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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판타시아(aphantasia), 눈으로 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병.

by 보통의아이 2020.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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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판타시아(aphantasia), 눈으로 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병.

눈으로 본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시각실인(Visual Agnosia)’이라고도 불린다.

실인은 시력·청력 등 1차적인 지각 기능에는 장애가 없지만, 대상물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판타시아를 겪는 사람들은 시각적으로는 사물 인지가 가능해 형태와 색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있으나, 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판타시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나는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내가 아판타시아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작년 말에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았다. 조금, 아니 꽤나 큰 충격이었다.

뭐랄까, 내가 희귀병에 걸렸어! 나는 너네랑 달라! 나는 좀 특이해! 이런 느낌은 아니고.

그냥 정말로 말 그대로 대충격. 뭔가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 벼락이 내리 꽂힌 느낌이랄까.

 

나를 포함한 모두가 같은 A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가 A가 아니라 B였다는 느낌?

뭐라고 100%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 충격인 건 어떤 계기로 아판타시아라는 단어를 알게 되고 궁금증을 느껴 글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평생 내가 다른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거다.

내가 B라는 사실을 자각조차 못한 채 A로 살았을 듯.

 

 

아판타시아를 알게 되고 나에겐 좋은 핑곗거리가 하나 생겼다.

물론 100%는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기억을 잘 못하거나 친구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지난 과거를 나만 혼자 기억하지 못할 때. 어떤 가상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만 혼자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 했을 때.

그때 느꼈던 나의 상상력 부족에 대해 조금은 아판타시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서. 어린 시절 잠이 안 오면 '양'의 수를 세며 양 이미지를 떠올리면 잠이 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양을 세라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나는 정말 단순하게 속으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라고 속으로 계속 말을 되뇌었을 뿐, 양을 떠올리면서 실제 양의 숫자를 이미지로 떠올릴 수 없었다. 이미지를 떠올리라는 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그리고 미술시간.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왜 이토록 그림을 못 그리는 지도 이해가 간다.

나는 항상 친구들이 뚝딱 그림을 그려내는 게 신기했다. 내가 정말 똥손이구나 생각했고,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정말 졸라맨 같은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도 나보다는 신체의 구조를 더 잘 그렸던 것 같다.

 

 

나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사람이다.

해서 항상 그리던 같은 형태의 얼굴, 눈, 코, 입. 동일한 그림을 그냥 여러 번 계속 똑같이 그려서 외워서 그림을 그렸던 거다. 항상 동일한 그림을 정해진대로만 연습한 대로 똑같이만 그릴 수 있을 뿐, 움직이는 형태의 사람 몸이나 옷을 그리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 그냥 못 그렸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옆모습의 사람, 반쪽뿐인 눈과 이마를 덮는 정도의 머리칼만 그렸다. 왜냐면 그 모습의 그림만 연습해서 외워 그렸으니까.

(상상이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게 아니고 수학 공식처럼 그림을 외웠다는 의미)

 

목 아래로 사람의 신체를 그렸던 것은 정자세로 서있는 그림 외엔 그려본 기억이 없다. 이 마저도 완벽하게 그린적이 없고 흐지부지 그렸던 것 같다. 물론 만화책을 보고 따라 그린적은 많았지만. 나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릴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너무 만화책을 좋아했고, 잘 그리고 싶었지만 상상할 수가 없으니 창작하여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직접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 것은 꽤 열심히 했고, 나름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미래를 상상하라던가, 가족의 얼굴을 그려라 등의 무언가를 떠올려서 그리라는 일은 나에겐 곤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내가 똥손이고 예체능에 재능이 없는 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웹디자인, 홈페이지 제작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것도 창작해서 만들어내지 못했던 나는 직업도 그림과는 일절 상관없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아판타시아라고 해서 특별히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알지 못하고 지나쳤다면 아마 평생 불편함 따위 1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을 테니까.

그냥 나는 상상력이 좀 부족하고, 현실성 없는 얘기에 집중을 못하는, 예체능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이 정도의 좌절이라면 좌절이랄까. 그 외엔 별다를 게 없었다. 예체능은 원래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울할 것도 없으니.

 

하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고, 이제 나는 내가 아판타시아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가능하지만 나는 할 수 없는 몇 가지 것들의 대해서 조금은 슬픔 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가장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방금 전에 본 사람의 얼굴도 떠올릴 수 없다는 것.

지금 실시간으로 내 눈으로 보지 않는 모든 것은 돌아서면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다.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은 사진이 없다면 평생 떠올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헤어진, 이제는 멀어진 한때는 나와 가까웠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도 없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두 기억 못 하겠지?)

 

소설책을 읽어도 글로만 내용을 읽을 뿐, 이미지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판타지나 sf 소설은 읽어도 별로 흥미롭지 않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그림을 자유롭게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릴 수 없는 것 등등.

 

 

그리고 또 하나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어떤 사건사고에 휘말려 범인의 몽타주를 그려야 할 때!

피해자들이나 목격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도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어 내는 걸까? 나는 늘 그게 너무 신기했다.

나는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큰 특징, 이를테면 어느 위치에 커다란 점이 있었다, 정도의 어떤 '사실'에 대해서는 묘사할 수 있어도 세부적인 눈썹의 모양, 눈의 크기, 모양, 코의 모양 등을 묘사하여 몽타주를 만드는 것은 정말 너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내 주변 지인들이나 친구들에게 '나 아판타시아입니다.'라고 말해보니 모두들 반응이 시큰둥하다.

그냥 그렇구나? 그래서 뭐? 별로 커다란 희귀병은 아니네! 괜찮아 사는데 지장 없잖아?

뭐 대체로 이런 무덤덤한 반응이다.

 

맞다. 상상을 못 할 뿐인 병은 물론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여태 아판타시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잘만 살아오기도 했다. 다만 나는 이제 내가 아판타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상상 속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부럽다. 하지만 그들은 아판타시아에 대해선 1도 관심이 없다.

나는 얘기를 좀 해보고 싶었는데! 아니면 나와 같은 사람과 너도 나와 같구나, 하면서 얘기라도 나눠보고 싶은데. 네가 그렇구나 조금은 다르구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다들 그냥 사는데 문제 있는 큰 병 아니니까 괜찮다면서, 아픈 병 아니니 괜찮다며 위로한다. 위로해달라고 말한 건 아니고, 그냥 좀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왜 내 주변엔 나와 같은 사람이 없는지도 의문이다.

생각보다 아판타시아는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어떤 계기로 아판타시아에 대해 알게 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아판타시아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싶다.

 

아 그리고 아판타시아는 꿈을 꾸지 못한다, 라는 글을 본적이 었었는데 그건 사람마다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는 꿈도 꾸고, 가위눌림도 많이 경험한다.

다만,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의 생김새나 자세한 내용들이 기억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 흑백으로 블러 처리된 느낌이다. 그냥 아는 사람이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대충 누구네. 모르는 사람이네 이런 느낌이 드는 편이다. 잠에서 깼을 때는 깨기 바로 직전의 강렬했던 스토리만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편이다.

 

어디서 얘기할 수 없었던 정리안 된 속마음을 그냥 일기 삼아 블로그에 주절주절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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