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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만화속세상

우리들이 있었다, 만화책. 우울하고 애틋한. 나의 순정만화.

by 보통의아이 201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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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있었다, 우울하고 애틋한. 나의 청춘을 함께 해준 순정만화.

초등학교 2학년이었나, 그때부터 나는 만화책을 봤다. 나는 뭔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지난 기억들은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추억을 얘기할 때에도 정말 충격받았거나 상처 받은 일들은 기억하지만 소소하게 일어난 일들, 내가 봤던 책들, 영화 등의 내용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렇게 읽고 보고 잊어버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인생의 첫 베스트 만화를 찾게 된 것이다. 마음 깊이 새겨놓고 꼭 기억해두고 싶은 이야기를 말이다.

 

처음엔 <우리들이 있었다>라는 제목에 이끌려 이 만화를 봤다.

우리들이 있었다니. 우리들이 있다도 아니고. 있을 것이다도 아니고. 있었다라는 과거형 문구에 나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마음을 뺏겨버렸다. 고백하자면, 나는 우울한 성향의 아이였고 사랑이 뭔지도 몰랐던 중2의 소심한 학생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공주님 환상에서 벗어나,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로맨스에 물들기 직전, 나는 야노와 나나미의 이야기에 빠져버렸다. 만화 속 세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판타지 같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말도 못 하게 현실감이 들어서 차갑고 우울했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 붙이자면 나는 중2, 그 당시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엄청난 괴롭힘을 받는 왕따는 아니지만 거의 왕따처럼 혼자 지냈다. 그래서 더 만화 속 이야기에 빠졌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우습게도 야노에 나를 투영하면서 만화를 봤다. 나는 여자이지만 나나미 같은 사랑스러운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둥글게 세상을 살고 내 감정을 표현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은 잘 몰랐다.(근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문제.)

 

우리들이 있었다 초반부의 내용을 보면 아기자기한 그림체에 맞게 투닥거리다가 관심이 생기고 그 마음이 커져서 좋아하고 사귀게 되는 평범하고 알콩달콩한 순정만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만화 추천을 받거나 1순위 만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 만화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단순히 그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중2부터 20대가 될 때까지 꾸준히 발매된 만화는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를 보게 된다면 정말 그림체와는 맞지 않게 우울한 순정만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 어쩌면 캐릭터들이 발전해 나가는 성장만화 같기도 하다. 타 만화처럼, 아기자기한 그림체처럼, 밝고 씩씩하게 힘을 합쳐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게 좀 문제지만. 어쩌면 바보처럼 혼자 힘들어하고 고민하면서 도망가는 게 내 이야기 같기도 해서 더 감정이입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셔서 견디기 힘든 슬픔을 겪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이 만화의 작가님도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님이 한참 휴재를 하고 난 후 다시 만화를 그리게 되었을 때는 그 슬픔이 만화에까지 파고들어 야노에게 전염이 된 것만 같았다. 만화의 내용이 점점 더 우울열매를 먹은 것처럼 슬펐으니까.

 

책의 중반부의 내용은 야노와 나나미의 다툼과 헤어짐, 오해와 화해 등의 내용이 나온다. 이 파트도 역시 아기자기하고 귀엽다. 여자와 남자의 입장에서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도 나오고, 너무 좋아해서 불안해하거나 주변 인물들이 갈등을 만들어 내는 삼각관계의 구도도 나온다.

 

그러다가 남자 주인공인 야노의 아픈과거나 현재 상황, 그에게 일어나는 끔찍한 현실들이 나오는 후반부의 파트가 나오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야노라는 캐릭터를 탐탁지 않아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나나미라는 어여쁜 여자 친구를 두고도 어두운 터널 속으로 혼자 들어가 버리니까.

그리고 나나미의 곁에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다정한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남자 주인공이 바뀌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야노가 너무 안타까웠다. 차라리 이 만화가 빨리 끝나서 야노가 저 긴 터널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내가 보는 게 순정만화인지 야노의 시련 극복기인지 헷갈릴 정도로 야노라는 캐릭터가 불쌍했다. 물론 사랑스런 나나미도 그를 기다리느라 눈물로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만화를 안 본 사람을 위해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면,

야노는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전 남자 친구와 생일날 같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야노는 좋아하는 여자의 죽음+전 남자 친구와 있었다는 배신감으로 슬프면서도 분노에 쌓여 여자를 잘 믿지 않았지만, 나나미를 만나 다시 한번 마음을 열고 연애를 시작한다.

알콩달콩 사귀면서 평범해 보였지만, 문득문득 죽은 여자 친구의 모습을 나나미와 겹치면서 오해와 갈등이 쌓여 사귀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야노의 단짝 친구인 타케우치도 나나미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게 되어 삼각관계가 진행되나, 두 사람의 관계를 악질적으로 방해하진 않는다.(전형적인 착한 서브 남자 주인공 느낌)

다만, 야노가 집안 사정으로 전학을 가게 되고부터 야노의 삶은 점점 불행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야노는 좋아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게 된다. 이때부터 나나미와 타케우치는 연락되지 않는 야노를 기다리면서도 오랜 기다림에 지쳐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모두 재회하게 되고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이다.

 

중간에 일어나는 몇 가지 큰 에피소드들은 다 기재하진 않았으니, 이 만화가 궁금한 사람들은 직접 찾아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간략한 스토리만 보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그림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보는 게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 만화이다. 재미있는 로코 만화를 찾는다면 추천하기 좀 어려운 만화다. 마냥 재밌기보단 무거운 느낌의 순정만화다. 아기자기한 그림체만 보고 이 만화를 고른다면 배신당했다는 기분도 든다.

 

연재 당시에는 인기가 꽤 좋아서 애니화도 되고 영화화도 됐던 만화책이다.

사실 만화 속 인물을 실사화 하는 게 매칭이 잘 되지 않아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만족도가 그렇게 크진 않았다. 많은 분량의 내용을 단 몇 시간 안에 넣기엔 많은 부분들이 잘려 나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다만 애니는 그래도 작붕이 일어나는 장면들을 빼고는 섬세한 느낌으로 잘 만들었던 것 같다. 특히 애니에 삽입됐던 음악들도 섬세하고 애틋한 느낌으로 만화의 내용과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나는 이제 30대 초중반이 되었고, 그때만큼 어리지도 순수하지도 않지만 아직도 난 이 만화를 떠올리면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든다. 마냥 행복한 시절은 아니었어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내 어린 시절과 내가 사랑했던 엄마가 있던 그 기억들이 머릿속에 맴돌아 잠시나마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일까.

 

추가로, 언젠가 리뷰하겠지만 오바타 유키 작가님의 다른 만화들도 추천하고 싶다. <우리들이 있었다>보다는 가볍고 짝사랑이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내용들이 많은 <좋아 싫어 좋아>, <네가 이겼어>, <스미레는 블루>, <동그라미 삼각 사각> 도 함께 읽어보면 좋다.

 

만약

거기서 멈춰 서 있었더라면

길의 방향을 꺾었더라면

돌부리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다른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멈추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만약, 만약..

 

울었던 일도

웃었던 일도

모든 건 다정한 추억 속에.

그리고 오늘도 기도한다.

 

부디 당신에게도 추억이 늘

다정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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