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슈퍼 을이었는지 생각한다.
고객과 상대하는 업무를 해왔던지라 자동 쭈구리 모드였는데 내가 물건을 사는 고객 입장이 되어서도 나는 꽤나 을이었다. 아무리 봐도 상대방 잘못인 것 같은데 서로 기분 나쁘기 싫어서 친절하게 혹은 정중하게 얘기를 하면 사람을 호구로 보고 막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도대체 왜? 왜 친절히 말해주면 더 만만하게 보는 걸까?
나는 그런 게 너무 싫었다. 강약약강인 그런 태도들. 강강약약으로 대해주면 안 되는 걸까? 내가 하는 업무에서도 나는 어떤 것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그게 참 답답했다. 왜 나는 강강약약을 하고 싶은데 회사에서는 강약약강을 시키는 건지 나는 도무지 그 점이 납득되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절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나는 그곳을 떠났다. 절을 옮길 수 없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처럼.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정중히 해결을 요구하는 고객에겐 최대한 친절하게 해결책을, 말도 안 되는 진상짓으로 보상을 요구하거나 땡깡 부리는 고객에겐 더 FM으로 일처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위에서 나를 눌렀다. 그냥 진상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아아, JS. 정말 지긋지긋한 인간들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자꾸 들어주니까 점점 더 그런 요구들이 심해지는데 그냥 그대로 방치할 뿐이다. 나중에 아주 큰 사건이 터져서 이슈화나 되어야 좀 변하는 척할 뿐.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슈퍼 을이고 슈퍼 약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약약을 하고 강강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그저 순응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게 너무 짜증 났거든. 나는 정말 너무 뼛속까지 을이었다.
30대가 되면서는 그래도 부당한 일이나 정중함이 무시로 돌아오면 참지 않기로 했다. 물론 내가 싫어하는 JS처럼 난리 치는 건 아니지만 정중하게 말해서 해결되지 않으면 더 당당히 그리고 나도 조금은 무례하게 요구를 한다. 이게 내가 일하면서 보고 배운 거니까. 당연히 처음부터 그러진 않지만 이제는 참는 것도 한계다. 가만, 혹시 JS들도 처음엔 정중했다가 이 과정을 겪고 나서 JS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나도 지금 그 길로 들어서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든다.
고객이 무례한 요구를 할 때. 그 고객이 아닌 직원을 보호해 주고 직원에 편을 들어주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말해줬더라면 사실 그 수많은 진상들이 그렇게 까지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요즘 친절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다 고마워서 똑같이 친절한 고객으로 남으려고 노력한다. 요즘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예민해진 게 이런 이유들이 크게 한 몫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확한 확인도 없이 네가 잘못한 거 아냐?라는 느낌을 보내면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뉘앙스를 숨기지 않고 태도를 내비치는 것부터 무시당한 기분이라 견디기가 힘들다. 어? 이것 봐라? 나는 열받아도 참았는데 너는 안 참네? 뭐 대충 이런 기분. 점점 쌈닭이 되는 느낌이다.
왜 어르신들이 나이 먹으면 그렇게 막무가내에 고집불통이고 자기 말만 하는지까지 차츰 이해되기 시작한다. 세상 눈치 안 보고 행복하게 산다는 게 눈치 없는 썅년이 되는 거라는 말도 솔직히 이젠 이해된다. 그저 아직 그 정도 레벨까지는 못 되는 슈퍼 을이라 통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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